일제가 대한민국을 근대화 시켰다??
일제는 한국인의 정신적 기반을 파괴하기 위해 이른바 민족정신 말살 정책을 실행하는데 1938년부터는 모든 학교에서 한국어 교육을 전면 폐지하고 일본어를 국어로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1940년 2월부터는 한국인의 성씨를 일본식 성씨로 창씨개명(創氏改名) 하게 하고, 한국인을 일본인화하기 위해 그들의 종교인 ‘신도神道‘를 들여와 전국 곳곳에는 ’신사(神社)’를 지어 그들의 조상에게 절하게 하였다. 심지어는 각 가정에도 가정용 신단인 “신붕神棚”을 만들게 하였고, 신사참배를 ‘모든 국민이 지켜야 할 마땅한 생활규범으로 강요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의 명산의 정기를 끊으려고 심지어 바다 속에까지 말뚝을 박았다.
 
그리고 조선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체질 인류학적 연구”를 시행하였다. 당시의 연구 자료를 보면, 한국인들은 머리가 작고 골격이 두꺼워서 뇌 중량이 작기 때문에 야만에 가깝다‘고 하였고, ‘일본인에 비해 동작이 활발하지 못하고, 얼굴 표정이 섬세하지 못하며, 조잡한 음식을 먹는 까닭에 소화기관이 발달하여 진화가 덜 된 미개인종으로 자신들이 통치해야 할 인종으로 낙인찍고 있다. 또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실화가 있다. 1907년 3월 도쿄 박람회에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전시물이 있었다. 한국인 두 명을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울타리 안에 가둬놓고 전시한 것이다. 일본인에게 한국인들은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의 한국인 참살 만행은 또 어떠한가? 일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무려 8백만 명의 한국인을 참혹하게 죽였다. 1894년 갑오동학혁명을 진압하면서 동학군과 양민을 합쳐 30만 명으로 추산되는 한국인을 학살했다. 그리고 1920년 만주에서는 한국인 5천 명 이상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간도 일대에서 자행된 한국인 학살을 지켜본 미국인 선교사는 “피에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 라고 탄식하였다. 1923년 일본 관동 지역이 대지진으로 초토화되자 일본정부는 조선인 폭동설을 유포시켜 일본인 자경단으로 하여금 약 2만 명이 넘는 동포들을 처참하게 학살하게 하였다.
 
또한 일제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른바 ‘마루타’라는 암호로 통하던 생체실험에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731부대가 세균성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을 상대로 고속 원심분리기를 사용해 생사람의 피를 짜내서 죽이는 실험을 하였고, 사람 몸에 말의 피를 넣어 어떻게 죽는지 관찰하기도 하였다. 또 독가스를 살포하여 얼마 만에 죽는지 실험하고, 페스트와 콜레라균을 주입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체의 70% 이상이 수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생사람을 한증막에 넣고 쪄서 수분을 빼서 죽이는 실험을 감행하고, 사람에게 물을 주지 않고 빵만 먹이면 6~7일 만에 퉁퉁 붓다가 피를 토하고 죽는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일본의 생체실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범죄 중의 하나이다.
 
일제 음모의 절정은 1933년 흥아(興亞)연구소라는 특수조직에서 꾸민 경성천도(京城遷都) 공작이다. 일본인 1천만 명을 한반도로 이주시킬 것을 계획한 이 공작이 실행되었더라면 한국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전쟁에 광분한 일제는 쌀 한 톨, 쇠숟가락 하나까지 수탈함으로써 조선 민중은 간신히 목숨을 연명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또 일제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만들어 호적제를 도입하자 항일 운동가들은 "일본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등록을 거부하고 무국적자로 살았는데 1947년 ‘과도법령 11호’를 통해 일제 호적에 등재됐던 국민들에게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함으로써 많은 애국지사들이 국적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머나 먼 타국에서 목숨을 바친 항일 독립투사들은 대한민국 국민에서 배제시켜 버린 것이다.
 
반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그들에게 충성을 다하고 독립운동을 방해하던 자들의 후손들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친일을 합리화 시키며, 지금껏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다. 관용의 나라 프랑스의 경우 4년간 나치에 협력한 반민족자 100만명을 체포하여 1만 명이 넘는 사람을 즉결 처형하였다. 자신의 민족을 배신하고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호의호식하며 살던 친독에 있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단한명의 친일파도 처형당하지 않고 친일파가 그대로 기득권을 유지하며 친미파가 되었고, 그들은 반공을 외치며 민족주의자들을 빨ㄹ갱이로 몰았다. 때문에 어떤 사학자는‘우리나라는 친일청산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일파에 의해 민족주의자들이 청산 당했다’라고 말한다.
 
이병도와 같은 식민사학자들도 해방과 더불어 추방은 커녕 서울대 사학과 초대교수가 되고, 60년도에는 문교부장관까지 한다. 주류 학계를 장악하게 된 식민사학자들의 손에 우리나라는 60년간 역사 교육을 맡겨 왔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병도같은 식민 사학자가 우리나라 학계의 주류가 되었을까?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고, 일제에 편승한 친일파는 제도권 안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해방과 동시에 2년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국은 미국의 입장을 대변할 한국인 정치가를 물색했고, 그 적임자는 이승만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던 김구 선생이나, 여운형 선생 등은 강력한 민족주의자로 미국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반면 이승만은 친미주의자로, 미국에 살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지식인이었다. 게다가 부인도 미국인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지지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게 된다. 해방직후 친일파 숙청의 건의가 거세게 들어오자 반민족 행위자 특별 처벌법을 만들어 반민특위를 만들었지만, 이승만 대통령 직권으로 1년만에 유야무야 없던 일로 해버린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백남운 같은 사회경제학자 계열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안재홍, 정인보 등 민족사학의 거목들이 납북되자,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시켜 한국의 역사학계를 독차지한다. 그렇다면 일본의 한국 역사 파괴 공작은 언제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9세기 중반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해 세계 제패의 꿈을 키우면서 조선을 강탈한 일본은 총칼로서는 조선을 잠시 지배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지배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역사서를 조작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을 깨닫고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관습과 제도를 조사한다는 미명하에 1910년 11월부터 약 14개월 동안 한반도 구석구석을 뒤져 역사서를 포함한 20여 만 권의 각종 도서를 수거하여 대부분 불살라 버렸다.
 
1916년 중추원 산하에 ‘조선 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발족시켰고, 1925년에 일왕의 칙령으로 조선사편수회로 개편하고, 16년 동안 무려 100만 엔에 이르는 거액을 투입하여 조선총독부 최대의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가 총 37권, 2만 4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 사료집으로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의 역사서”이다. 이렇게 일본에 의해 조작된 역사책을 전국 각 기관에 배포하고, 각 학교에서는 조직적으로 교육하였다. “조선사편수회”의 이런 역사 말살 정책에 대해 당시 언론은 “우리의 역사를 일제의 손에 내어 주는 것으로 최후의 정신적 파산이다”라고 한탄했다(1925.10.22 동아일보)
 
우리민족은 지난 역사를 우리 손으로 직접 쓰지 못하고 침략자 일본이 썼다는 것은 한민족 근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 큰 비극은 일제가 왜곡하고 조작한 역사서가 아직도 살아남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 한국사의 주요 역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45년에 우리의 몸은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아직까지도 광복을 이루지 못했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학계는 “조선사편수회”에 몸담고 그들의 주구노릇을 하던 식민사학자와 그 후예들이 독차지하였다. 그들은 일제가 주장한 식민사관을 실증사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눌러앉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아직까지도 식민사관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면 식민사학자들이 위서라고 주장하는『환단고기桓檀古記』는 어떤 책인가?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신라의 대표적 십성(十聖) 가운데 한 분인 진평왕 때의 도통한 승려 안함로(安含老,579~640)의 “삼성기三聖紀 상(上)”과 세조가 팔도 관찰사에게 수거하도록 유시한 도서 목록(세조실록)에 고려 때의 인물, 원동중(元董仲)의 “삼성기三聖紀 하(下)”와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이었던 행촌杏忖 이암(李喦,1297~1364)선생의 “단군세기檀君世紀” 와
 
 
고려 말, 정몽주의 제자로 고려의 충신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분이었던 복애거사伏崖居士 범장(范樟)의 “북부여기北夫餘紀“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헌부 장령을 지냈던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1455∼1528)선생의 ”태백일사太白逸史”, 이 다섯 권의 책은 거의 천 년 세월에 걸쳐 다섯 사람이 저술한 사서가 하나의 책으로 묶여진 것이 “환단고기桓檀古記”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1864~1920)가, 지인들로부터 구한 한민족의 정통 사서들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안함로의 삼성기 상(上)은 그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것이고, 원동중의 삼성기 하(下)는 인근의 태천에 살던 백관묵白寬黙(평안도 태천泰川의 진사) 에게서 구하였다. 단군세기 또한 백관묵의 소장본이고, 북부여기는 삭주 사람 이형식李亨栻(평안도 삭주朔州의 진사)의 소장본(이형식의 소장본 단군세기와 백관묵이 소장한 단군세기는 그 내용이 동일하였다고 한다)이었다. 태백일사는 그의 스승이자 항일운동 동지인 조선 말 실학자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의 집안에서 전해 오던 것이었다. 계연수는 1897년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그 다음 두 해 동안(1898~1899)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참전계경, 태백일사, 천부경요해 등을 간행하였다.
 
1911년 계연수는, 그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장군과 오동진 장군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에서 환단고기 30부를 간행(스승 이기(李沂)가 일본에 나라가 병탄된 것에 비분강개하여 1909년 절식(絶食) 자진한 후 계연수는 만주로 건너갔다) 만주 관전현은 독립운동가와 열사들이 수시로 모여 강론과 훈련을 하던 곳이었다.
 
운초 계연수는 항일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천마산대, 서로군정서 등의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57세 때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목과 팔,다리가 다섯 토막으로 잘려 무참히 살해되었다. 당시 압록강에 처참하게 버려진 그의 시신이 수습되는 광경을 지켜본 14세 소년이 훗날 환단고기를 널리 대중화 시킨 이유립(1907~1986)선생이다.
 
이암(李喦,1297~1364)과 이맥(李陌,1455∼1528)의 후손인 그는 평안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이던 이관집(李觀楫)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유립은 계연수와 친했던 부친(이유립의 부친과 계연수선생이 친했던 것은 두 사람이 함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였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은 함께 광개토대왕 비문도 조사, 탁본하였다)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역사에 눈을 뜨게 되었다.
 
13세 때(1919) 단학회가 주관하는 교육기관인 배달의숙(倍達義塾)에 들어가 계연수, 이덕수 두 스승의 강의를 들으며 환단고기를 공부하였다. 그 후 독립군의 통신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신간회의 삭주 지부를 결성하는(21세)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단학회 기관지 ‘태극‘을 발행, 그 주간(主幹)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에 계연수 사후 그에게 전수된 환단고기를 가지고 월남하였다. 이후 단학회(檀學會)를 단단학회(檀檀學會)로 개칭하였고, 1963년 대전에 정착한 이후에는 후학을 기르며 역사 연구와 강연에 전념하였다(현재 단단학회 회장인 양종현은 1967년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유립을 약 20년간 모시면서 역사를 배웠다.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창작이란 비난에 대해서 그는 환단고기 초간본을 좁은 방에서 스승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글자 하나하나 짚어가며 배운 기억을 생생하게 전하며 결코 위작이 아님을 증언하고 있다)
 
한문과 역사에 해박한 이유립에게 여러 사람이 배움을 청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오형기(吳炯基)였다. 오형기는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알고자 하는 구도자적인 의지를 가지고 환단고기 공부에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1949년 이유립에게 환단고기를 빌려가 필사한 후 발문(跋文)을 써 붙였다. 그러나 책을 지은 사람이 쓰는 것이 상례인 발문을 오형기가 임의로 쓴 것에 대해 이유립은 심기가 편치 않았다고 한다.
 
이 필사본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이유립의 문하생 조병윤이 1979년에 서울의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에서 이 필사본을 영인하여 100부를 출판한 것이다. 이른바 ’광오이해사본‘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허락도 없이 시중에 배포되었다(조병윤은 스승의 허락도 없이 자신을 발행인으로 하여 책을 출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판권에서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소개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단단학회에서 파문을 당하고 이유립과 소원한 관계가 되었다.
 
 
오형기는 발문 파동 후에도 계속해서 단단학회 행사에 참여하였고, 이유립이 죽자 장의 위원장을 맡았다) 이에 사태 수습 차원에서 이유립의 단단학회는 문제의 발문을 삭제하고 오자를 바로잡은 새로운 필사본을 만들었다. 원고는 1979년 그해에 완료되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1983년에야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하여 100부 발간하였다(이유립은 배달의숙본 환단고기를 가까운 지인에게 기증도 하고, 원하는 사람에게는 판매도 하였다.
 
 
한때 초간본으로 잘못 알려졌던 숙명여대 소장본은 언론인 송지영이 이유립에게 받은 10여권 중의 일부가 대학에 기증된 것이다(양종현 증언) 그 무렵 환단고기가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는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광오이해사본을 입수하여 검토한 일본인 변호사 가지마 노보루가 환단고기를 일본 천황가의 뿌리를 밝혀 줄 수 있는 책이라 여긴 것이 발단이었다.
 
 
가지마는 환단고기는 아시아의 지보(至寶)라 극찬하고 자국의 정계와 재계의 후원을 끌어내어 1982년 ‘실크로드 흥망사’ 라는 부제를 붙인 일본어판 환단고기를 출간하였다(환단고기를 번역 중이던 가지마 노보루는 박창암 장군(월간 ‘자유‘발행)의 소개로 이유립을 찾아와 당시 이유립이 우리말로 번역하고 주석을 붙여놓은 환단고기 원고 원본을 ’일구일획도 바꾸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쓰고 빌려갔지만, 출판된 일본어판 환단고기에는 번역의 오류 정도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왜곡된 내용이 많았다. 그후 이유립이 우여곡절 끝에 박창암을 통해 돌려받은 원고는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었다(양종현 증언)
 
하지만 이 일본어판은 환국-배달-고조선-고구려-대진국(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를 배달-야마토일본-나라일본-헤이안시대로 이어지는 일본 역사로 둔갑시켜 놓았다. 동방 한민족의 역사가 중동 유대족의 역사에서 발원하였다는 황당한 주장도 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이유립과 임승국이 우리 고대사를 월간지 ‘자유‘에 수년 동안 연재해 오던 터라, 한민족의 상고 역사와 신교 문화가 조금씩 알려지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인이 쓴 환단고기가 한국에 역수입되어 소개되자, 한국 역사학계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대중의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다. 1985년 당시 고등학교 교사이던 김은수가 첫 번역서를 낸 이후 오늘날까지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환단고기 번역본이 출판되고 있다.
 
잃어버린 한민족의 시원 역사와 문화를 복구하려다가 일제의 역사 도륙의 칼날에 무참히 죽어간 계연수와 그의 스승 이기,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역사 연구에 헌신하며 환단고기를 널리 알린 이유립! 이들은 한민족 사학의 아버지라 불러 마땅하다 하겠다.
 
 
 
환단고기 진위 논쟁
한국 사학계는 대체로 환단고기를 정식 역사서로 인정하지 않는다. 환단고기를 시대의 필요에 의해 조작된 위서로 매도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환단고기의 출간 과정이 미심쩍다고 한다. 그들은 1911년 계연수가 간행한 원본이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 큰 혐의를 둔다. 이유립이 분실하였다는 원본이 보존되고 있다면 환단고기 위서 논쟁은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창작이라고 주장한다. 이유립이 1979년(광오이해사본 출간 연도) 이전부터 월간지 “자유“에 기고해 오던 글을 모아 환단고기를 간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광오이해사본은 오형기의 필사본을 영인한 것이고, 오형기 필사본은 이유립의 소장본을 필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본이 만들어졌고(1949), 그 후 영인본이 나올(1979) 수 있었다. 따라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1979년 이후 대중에게 알려진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가지고 있던 계연수본이 재간행된 것임이 틀림없다.
 
 
위서론자들은 심지어 ‘계연수가 수안 계씨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들어 계연수 선생을 가공의 인물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수안 계씨 종친회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북한 출신 종친들 중 족보에서 누락된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느라 후손이 끊긴데다가 증언자도 없어 족보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계연수를 유령 인물로 매도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을 두루 고려하지 않고 단편적인 사실 하나를 내세워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계연수가 실존 인물이었음은 그 제자인 이유립의 증언과 여러 문헌에서 입증되고 있다(계연수가 실존 인물임을 증명하는 문헌으로는, 그가 천부경을 입수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 경위가 기록되어있는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1920)과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1969)등이 있다.
 
위서론자들은 또 자유, 평등, 인류, 세계, 원시국가, 문화,문명, 개화, 부권(父權), 헌법과 같은 근대어가 쓰인 것을 빌미로, 환단고기를 일제강점기 때 독립 운동가들이 민족주의를 고양하기 위해 꾸며낸 책이라 한다. 그런데 이 어휘들은 고문헌에서도 발견되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 자유는 ‘자기가 주인이 되다’라는 뜻으로, 평등은 산스크리트어의 번역어로서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자유와 평등도 그러한 뜻으로 쓰인 것이다.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에 나온 시선집인 옥대신영(玉臺新詠)에 수록된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에서 “내가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분함을 품고 있었는데, 네가 어찌 멋대로 할 수 있는가(吾意久懷忿 汝豈得自由)라고 하여 ‘자유’라는 어휘가 나온다.
 
인도 승려 구마라습(鳩摩羅什,344~413)에 의해 한문으로 번역된 금강경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편에 이 법은 차별이 없어 높고 낮음이 없다(是法平等 無有高下 )라고 하여 ‘평등’이란 어휘가 사용되었다.
 
장자 지북유(知北遊)편에서 “생물은 이를 서러워하고, 사람은 이를 슬퍼한다(生物哀之 人類悲之)라 하여 ‘인류(人類)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당나라 때 한문으로 번역 된 능엄경의 ‘무엇을 중생세계라고 합니까(何名爲衆生世界)라는 구절에 ’세계‘라는 어휘가 사용 되었다.
 
주역 계사하(繫辭下)의 ‘군자는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존립해 있을 때에도 멸망을 잊지 않으며, 잘 다스려질 때에도 어지러움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몸을 보전할 수 있고, 집안과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君子安而不忘危 存而不忘亡 治而不忘亂 是以身安而國家可保也)라는 구절에서 고대로부터 사용된 ’국가‘를 확인 할 수 있다.
 
‘문’과 ‘화’가 결합된 문화라는 말은 고대에 이미 사용 되었으며, 문으로써 가르쳐 변화시키다(以文敎化)를 뜻한다.
 
전국시대의 역사서인 국어(國語), 진어(晉語)편을 보면,“선행을 상주고 간악한 행위를 벌주는 것은 나라의 법이다(賞善罰姦 國之憲法也)하고 하여 ‘법’, ‘법전’을 뜻하는 ‘헌법’이 나온다.
 
백번 양보하여 정말 근대어가 가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환단고기 자체가 완전 조작된 위서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인류사의 여러 경전들을 돌이켜 보라.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지 않았는가.
 
주역(周易)은 태호 복희씨로부터 공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고, 도덕경은 왕필이 덕경과 도경의 본래 순서를 뒤집어 재구성한 것이다.
 
동양의학의 성서인 황제내경은 황제 헌원을 가탁하여 전국시대를 거쳐 한 대에 성립되었고, 불교의 화엄경도 분리되어 있던 경전들이 수차례의 결집을 거쳐 후대에 합쳐진 것이다.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다섯 권의 사서가 천 년에 걸쳐 쓰인 사실과 그 중 가장 나중에 쓰인 태백일사가 나온 지 400년이 지나 환단고기가 묶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원래 다섯 저자들이 쓴 원본이 무수한 전란과 외세의 사서 강탈을 무사히 피하여 전해졌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계연수가 모은 다섯 권은 필사 과정에서 인물, 연대, 장소가 오착되기도 하고 부족한 내용에 가필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들과 다소 어긋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민족의 국통 맥, 태곳적 한 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독보적인 가치가 전적으로 매도 될 수 는 없다.
 
그리고 계연수가 처음 펴낸 후 70년이 지나 이유립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환단고기를 다시 펴낼 때 가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도적인 조작과 첨삭이 아니라 누구의 손에 의해서든 꼭 이뤄져야 할 보정 작업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보정조차도 원전을 훼손하지 않는 아주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위서론자들은 또한 환단고기에 삼신, 삼신일체, 영혼 등 기독교 교리 용어와 유사한 말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환단고기는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에 날조된 책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삼신과 삼신일체(三神一體)는 한민족이 그 중심에 있었던 상고시대 신교 문화의 중요한 고유 술어이다. 우리의 고유한 문화 언어 삼신일체(三神一體)를 기독교의 술어 삼위일체(三位一體)와 혼동하는 것은 우리 상고사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교 삼신문화의 역사관으로 역사관으로 한민족과 인류의 태고 역사를 기록하였음에도 이 땅의 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환단고기의 비운은 뿌리 문화가 말살된 한민족의 참담한 역사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할 것이다.
 
 
IMG_1399943284.jpg고대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130년에 걸친 이라크 지역의 유적 발굴을 통해 서양문명의 뿌리인 수메르문명이 세상에 드러난 것에 필적하는, 20세기 동북아 최대의 발굴 사건이 있다. 요서지역(발해연안 지역)의 신석기, 청동기, 문화 발굴이 바로 그것이다.
 
요서 지역 발굴은 프랑스인 에밀 리쌍이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내몽골 적봉 지역에서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한 것으로 시작되었고, 21세기에 들어와서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2006년 6월에도 거대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내몽고 적봉시 오한기의 초모산(草帽山) 유적지에서 5500년 전 적석총군이 발견되었다(2006.6.10 중국CCTV보다 내용).
 
요서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BCE 6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소하서문화이다. 현지인조차 길을 헤매는 오지에 위치한 소하서 유적은 당국의 문화재 신고 정책에 따른 주민의 신고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은 이 문화를 단지 ‘인류 최고最古의 신석기 문화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소하서 유적은 BCE 6000~BCE 5000경에 만들어진 발해연안 빗살무늬토기와 그 연대가 일치한다. 그리고 발해연안 빗살무늬토기는 그 재질과 모양이 만주와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계통이다. 이것은 소하서 문명의 주인공들과 동방 한민족의 강한 연관성을 보여 준다.
 
IMG_1399943419.jpg발견된 지명을 따서 이름을 붙인, 요서의 여러 신석기 문화 가운데 세간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은 곳이 바로 홍산문화이다. 적봉시에 위치한 철광석으로 뒤덮인 붉은 산 ‘홍산紅山’에서 이름이 유래한 이 문화는 ‘석기와 청동기를 섞어 사용한 BCE 4500~BCE 3000년경의 문명으로 판명되었다.
 
홍산문화는 1979년 객좌현 동산취촌 발굴과 1983년 그 인근의 우하량촌 발굴을 계기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동산취에서는 엄청난 제사 유적이 발견되었고, 우하량에서는 돌무덤신전, 제단이 동시에 발굴되었다. 그것은 다른 신석기문화에서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우하량의 16개 유적지 가운데 13곳은 적석총(돌무지무덤) 유적지이다.
 
적석총은 고대로부터 삼국시대 때까지 계속 나타나는 무덤 형식으로 황하문명권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는, 동이족의 대표적 묘제墓制이다. 충적층 지대인 황하지역에 살던 화하족(현 중국 한족의 조상)은 흙으로 만든 토광묘를 지었고, 산악과 평지가 공존하는 요서 지역에 살던 동이족은 주로 돌무덤을 지었다. BCE 4천 년대에 돌무덤 묘체를 쓴 요서의 동이족은, 환단고기에 의하면 모두 배달 문명권에 속해 있었다.
 
홍산문화가 환단 시대의 동이족이 일군 문화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우하량의 여신묘에서 발굴된 유물들이다. 이형구 박사는 홍산인들이 여신을 모신 사당을 지어 지모신地母神에게 제사지냄으로써 풍년과 다산多産을 기원했다고 말한다. 여신을 모시고 곰과 새를 신성시한 홍산인들을 환단시대와 연관 지을 수밖에 없는, 환단고기가 전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배달 시대 초기, 호족과 웅족이 환웅을 찾아와 환족으로 교화되기를 청하였다. 호족은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남권 중심의 사나운 부족이고, 웅족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여권 중심의 우매한 부족이었다. 삼신의 도를 깨우쳐 광명 민족이 되기 위해 수행에 들어간 두 부족 가운데, 웅족만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 무사히 수도생활을 마치고 환족이 되었다. 고고학 현장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문헌이 기록한 역사를 종합하면, 홍산문화는 환단의 문화로 귀결된다.
 
유적과 유물이 대부분 ‘사상 처음’이고 ‘최고最古’인 이 홍산문화를 중국 학계와 정부는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문명의 시발점으로 전 세계에 소개하고 있다. 오랑캐 땅이라 치부하던 만리장성 이북에서 발견된 문명을 황하문명의 원형으로 규정하게 된 난처함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은 다민족 역사관을 내세웠다. 중국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 땅에서 발견되는 소수민족 문화는 모두 중국 문화라는 것이다. 황하문명보다 훨씬 일찍 태동하여 동북아문명의 기초가 된 환단의 문화가 중국 문화로 둔갑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IMG_1399943977.jpg“환단고기桓檀古記”를 널리 대중화 시킨 이유립(1907~1986)선생이다. 그런데 계연수선생은 1911년에 발간된 환단고기 초간본을 왜 굳이 1980(경신)년에 책을 공개하라고 하였는가. ⇒ 1911년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직후였다. 또한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후대 사람들한테 한민족사의 뿌리역사와 혼이 담긴 『桓檀古記』가 전해져야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일제에 의해서 빼앗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계연수 선생은 1980년에 공개하라고 했던 것이다.
 
 
1980년도 직전까지는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의 군부통치 유신체제 시절로 표현의 자유가 금지되던 시기였다. 때문에 80년 서울의 봄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그동안 음지에서 숨어있던 민중서적과 금서들이 봇물터지듯 나왔다. 결과적으로 계연수 선생은 적절한 시기에 “桓檀古記”를 세상에 알리라고 하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출처: 상생출판사에서 발행한 “桓檀古記”에서 부분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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