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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9 10:06
다들 더위에 잘 지내시는지요!!
저는 서울 태릉고등학교에 근무하는 윤정현입니다.
전지연 학술국장을 맡고 있습니다.
매번 홈페이지에 어떤 글을 올릴까 고민을 하다, 제가 좋아하는 책 읽기와
관련된 독서일기를 꾸준히 올려 볼까 합니다.
대부분 발췌수준이지만 간간히 제 생각 느낌도 적고, 무엇보다 좋은 책 소개한다는
마음으로 하려 합니다. 부족하지만, 얘쁘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두꺼운 삶과 얇은 삶」 p.28~46
“아파트에 살면서 나는 아파트가 하나의 거주 공간이 아니라 사고 양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중산층의 사고 양식이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술꾼에게 술을 마시면 취하는 병이 있듯이, 여러 가지 병이 있다. 그중 가장 큰 병은 새로운 더 큰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어 하는 병이다. 사람들이란 혼자 있을 때는 제법 사람 같은 생각을 하다가도 여럿이 있을 때는 금세 달라진다. 남 앞에서는 가능하면 은밀하게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그래서 가장 우선하는 것은 같은 동에, 또는 같은 층에 사는 사람이 자기보다 우월한지 우월하지 않은지를 탐색하는 것이다. … 다시 말해 그가 갖고 있는 것으로 상대편을 쉽게 판단해버린다. 상대방이 갖고 있는 것이 자기가 갖고 있는 것보다 많으면 우선 자기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아파트값이 움직이는 시기에는 모든 아파트 주민이 소다를 잔뜩 넣은 밀가루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아파트 단지는 사람을 적당히 미치게 하는 데에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아파트 병의 뿌리는, 내 빈약한 머리로 진단하기에는 남보다 더 잘 살고 싶은 데에 있고, 그것의 뿌리는 여러 의미의 경쟁심에 있고, 그 경쟁심의 결과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판가름 난다. … 아파트는 이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자기의 뛰어남을 확인하는 전시 공간이 된다.” (이 글이 쓰여진 시기가 1978년인 걸 감안하면 작가의 혜안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아파트는 모든 방의 높이가 같다. 다만 분할된 곳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파트에서의 삶은 입체감을 갖고 있지 않다. … 좀 심한 표현을 쓴다면 아파트에서는 모든 것이 평면적이다. 깊이가 없는 것이다. 사물은 아파트에서 그 부피를 잃고 평면 위에 선으로 존재하는 그림과 같이 되어버린다. … 아파트에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다 같이 자신을 숨길 데가 없다. 모든 것이 열려 있다. 그러나 그 열림은 깊이 있는 열림이 아니라 표피적인 열림이다. 한눈에 드러난다는 것, 또는 한눈에 드러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깊이를 가진 인간에게는 상당한 형벌이다. … 땅집에서는 사정이 전혀 딴판이다. 땅집에서는 모든 것이 자기 나름의 두께와 깊이를 가지고 있다. 같은 물건이라도 그것이 다락방에 있을 때와 안방에 있을 때와 부엌에 있을 때는 거의 다르다.” (어릴 시절 살던 시골집에는 다락방이 있었습니다. 외갓집에도 다락방이 있었죠. 그곳은 뭔가 비밀스럽고 때로는 포근한 공간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산다. 그러나 감출 것이 없을 때에 드러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감출 수도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사람은 자기가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숨겨야 살 수 있다. 그 숨김이 불가능해질 때에 사람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만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 무의식은 숨김이라는 생생한 역동성을 잊고 표면과 동일시되어 메말라버린다. 표면의 인공적인 삶만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상실은 아파트에서의 삶을 더욱 엷게 만든다. … 나는 아파트에서 살면서 내 아이들에게 가장 부끄러움을 느낀다.그 아이들은 비록 아파트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어린 시절을 아파트 단지에서 보냈다. …그들이 배우는 것은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과외 공부하기, 회색 시멘트에 길들기, OX식의 문제 알아맞히기, 그리고 재치 있게 말하기 따위이다. 한마디로 감춰지지 않는 것 배우기이다. … 거기에서 벗어나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가. 그것은 거기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당위만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파트에서 벗어나야, 아니 땅집으로 가야 사물과 인간의 두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내가 아파트에서의 삶에 깊이 물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저는 작년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왔습니다. 지은 지 30년이 넘어 낡고 불편한 점이 있지만, 그 시간만큼 자란 나무들과 숲이 있으며,그 속을 노니는 고양이들이 있어 저는 좋습니다. 그리고 작은 하천이 아파트를 지나 봄과 여름이면 아들과 함께 산책을 하거나, 장구벌레 같은 조그만 벌레들을 관찰하며 놀기도 합니다. 그래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자연의 상실’ 또는 자연의 부재가 우리 아이들에게 주는 문제에 대해 반대로, 자연의 존재가 우리에게 주는 효과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내 아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나의 잘난 체하는 태도의 소산이 아닌가? … 내가 두껍지 않을 때에 엷게 판단한다는 것이 될지 모르겠다. 아파트에 살면서 아파트를 비난하는 체하는 자기모순. 나에게 칼이 있다면 그것으로 너를 치리라. 바로 나를!”
(1978)
「‘라면’ 문화 생각」 p.47~62
“사람은 마음이 가난해지면 음식 타령을 하게 마련이다.” (‘먹방’이 유행하는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쉴새 없이 보여지는‘먹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허해지는 마음이 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군요.)
“‘라면’은 우리의 식생활에 중요한 활력소 역할을 한 음식이다. 그것은 밖에서 볼 때에 두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다. 그것은 첫째로 우리말에서 드문, ㄹ 자로 시작되는 말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외국에서 온 말처럼 느껴지는 말이다. ‘라면’은 라디오나 리트머스 시험지 따위와 같이 순수하게 우리말에서 나온 말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 둘째로, ‘라면’은 바로 그 기술 문명의 냄새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대량으로 생산되어 낮은 가격으로 판매되는 규격품이다.” (그러고 보니 도대체‘라면’은 왜 ‘라면’이 되었을까요?)
“평준화된 학교에서 평준화된 교육을 받고 규격품인 인스턴트 음식을 먹으며 기성복을 입고 똑같은 기사만을 내보내는 신문이나 잡지-라디오-텔레비전을 보는, 그러면서도 자기가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사회! … ‘라면’이라는 이상한 말로써는 외래적인 우리 문화에 억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규격 생산품으로써는 생각하는 사람의 자유를 그것이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사람됨은 그 문화적인 두께에서 나온다. …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적인 두께에는 대체로 네 가지의 결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문화적인 두께의 맨 아래층에는 가장 오래된 무속적인 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결이 있다. … 자연의 움직임에 민감하고, 그 자연에 한껏 가까이 감으로써 삶의 움직임에 균형을 주려는 삶의 태도가 바로 무속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 무속적인 태도 위에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무위, 소요의 삶의 태도나, 불교의 인과율적인 태도가 놓여 있다.… 그 위에 놓여 있는 것이 사람의 사람됨을 예절에서 찾는 유교적인 태도이다. … 그 문화적인 두께를 압도적으로 억누르면서 새로운 문화적인 사실이 된 것이 합리적인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라는 유럽적인 합리주의이다. … 그 합리주의의 물질적인 측면이 바로 기술 문명인데, 일본이 그 문명을 빨리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으니 우리도 그것을 빨리 배워야 하겠다는 것이 합리주의를 의심의 여지없는 문화적인 사실로 받아들인 한국 사람의 마음가짐이었다.그러나 문화적인 두께는 그리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 그래서 표면적인 합리주의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부딪힐 때에 슬그머니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합리주의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이를테면 아랫사람이 자기를 공경하지 아니할 때에, 집안에 걱정거리가 생겨날 때에, 또는 자기 앞날에 불안감을 느낄 때에 취하는 태도는 그 문화적인 두께가 얼마나 두터운지를 뒤집어 보여준다. 점을 치고, 불공을 드리고, 예의를 강조하는 것은 무의식 속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다른 결의 문화적인 사실의 존재 때문이다. … 그 두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 두께는 한국 사람의 사람됨의 근거 자체이기 때문이다.합리주의만으로 무장된, 또는 무속적인 태도만으로 무장된, 또는 유교적인 태도만으로 무장된 사람에게서 우리가 느끼는 거북함은 거기에서 나온다.” (저는 이 글을 읽는 순간 얼마 전 MBC 시사 프로그램 ‘스트레이트’에서 방영된 태극기 부대원(?)의 인터뷰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현재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는 잘하는 것이다. 한국은 일본에게 당해야 한다.아주 당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충격이었다. 이 말을 한 또는 이런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사람됨’은 무엇일까? 같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동일한 ‘한국 사람의 사람됨’을 공유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다만 안타까워하는 것은 합리주의가 즐거움의 영역을 점차로 잠식하여 그것을 줄여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 우리의 삶에 두께가 없게 느껴지는 것은 합리주의와 그것의 물질적인 측면인 기술 문명이 인간은 두꺼운 준재라는 것을 잊고 즐거움을 사람의 삶에서 자꾸 떼어내기 때문이다. 걸어 다니는 즐거움은 도시의 크기에 압도되어 거의 사라졌으며, 빈둥거리며 게으르게 세계를 바라보는 즐거움은 인위적인 삶의 리듬에 밀려 없어져가고 있다. 게으름은 이제 악덕이 되어가고 있다. 또사소한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감정의 낭비로 여겨지고 있다. … 즐거움에는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성이 있어야 한다.” (학교에서 나의 일상이 떠올랐습니다. 학교생활하며 느끼는 나의 ‘즐거움’은 무엇일까? 그들의 ‘즐거움’은 무엇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사소한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감정의 낭비’로 여겨지는 원인 중 하나는 학교가 교사를 너무 바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와 관련 없는 일,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무관심하게 무관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오히려 반대인 사람은 한가한 사람 취급을 한다. 씁쓸하다. 어찌 보면 ‘낭만’이 없어지는 건 당연하다.)
“합리주의와 기술 문명의 위대한 점은 사람을 세계의 중심에 세워놓으려고 하는 데에 있다. … 자연을 정복해가면서 사람은 자연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서 있게 되었지만, 그 대신에 그 사람은 자연과의 생생한 접촉을 잃고 점차로 추상화되어갔다. 자연을 이겨낸 것은 ‘사람들’이지 ‘자신’은 아니다. 사람은 세계의 중심이 되면서 점점 익명화되어간다. 이를테면 한 대의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지만 ‘자신’은 아니다. ‘자신’은 ‘사람’이라는 보통명사 속에 깊이 가라앉는다.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쨌든 지금의 한국 사람의 두께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는 작업을 서둘러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 역사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는지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사뭇 작가의 사고의 수준과 글에 한번더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통해 기술문명에 의해 ‘추상화된 인간’이 바로, 환경 파괴의 원인이라 생각 들었습니다. 또한 환경을 파괴하면서도 우리들은 그 ‘익명성’ 속에 숨어 나 ‘자신’은 그런 ‘사람들’과 다르다고 자위하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