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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2 23:29
방학이라 보충 끝나고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 준 후, 저는 벤치에 앉아 예전에 구입한 볼코프의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을 조금 읽었습니다. 저는 번역본의 경우 권말에 있는 번역자의 옮긴이 말을 먼저 읽습니다. 이 책의 경우 옮긴이 말이 상당히 좋습니다. 오늘은 옮긴이 말 중 일부를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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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드리미트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 솔로몬 볼코프 엮음
옮긴이의 말 – 초판 p.612~631
“『증언』은 20세기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일생에 걸친 회고록이다. 작곡가 스스로가 펜을 든 것은 아니고 음악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솔로몬 볼코프가 쇼스타코비치의 구술을 듣고 정리한 형태로 되어 있다.”
“러시아의 국가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그가 어떤 태도를 취했으며, 그런 태도가 그의 음악과 어떤 관계에 놓이느냐 하는 문제는 그의 인생에서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실 우리 역사에서도 국가적·세계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희생된 또는 정반대로 이를 활용한 상반된 음악가가 있습니다. 바로 윤이상과 안익태입니다. 제가 음악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윤이상의 음악을 들으면 현대음악의 그 난해함 속에 우리 전통 음악의 느낌때문에 묘한 공감이 느껴지고 합니다.)
“쇼스타코비치는 190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975년에 죽었다. 그가 연한 살 때 10월 혁명이 일어났고,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스탈린이 권력을 쥐었다. 그는 스탈린과 흐루쇼프의 시대에 살았고 브레즈네프가 권좌에 있을 때 죽은 것이다. … 쇼스타코비치의 고향이자 그가 평생 애착을 가졌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에서도 약간 독특한 위치에 있는 도시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대표적인 전제군주인 표트르 1세가 ‘러시아의 서구화’를 위해 인위적으로 건설한 ‘유럽으로 나가는 창구’였다. 이 도시의 건설 과정에서 죄수, 정치범, 농노가 무수히 죽어나갔다. 문인들은 이 같은 이유로 이 도시의 존재 자체를 저주했다. 한편, ‘유럽으로 나가는 창구’를 통해 들어오는 자유로운 사상과 새로운 예술 사조는 그런 개인들에게 더 넓은 상상력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모스크바가 러시아 문화에서 슬라브적인 부분을 대표한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비슬라브적인 것 또는 코즈모폴리턴적인 취향을 상징한다. 문인들과 예술가들에게 상트페트르부르크는 더 넓은 세계로 나가는 항구이며 현실의 억압적인 상황과 자유 사이의 한계 지점이었다. 또는 억압과 자유가 공존하는 모순의 현실태이기도 했다.지식인들은 애증이 뒤얽힌 태도를 지닌 채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문득 드는 생각은 20세기 초 조선의 도시 중에서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와 같은 성격의 도시는 어디였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서울 또는 항구 도시인 인천과 부산, 군산 등지였을까요? 아니면 서울의 총독부가 있는 거리, 구보씨가 걸으며 다방을 배회하던 종로였을까요? 지리를 좀 더 재미있게 이야기하려면 역시나 ‘역사’와 ‘문학’에 대한 기본 바탕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1차 대전이 발발하여 독일과 전쟁을 치르게 되자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에 있는 독일 냄새를 없앤다는 이유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사회주의 혁명을 세계로 전파하는 창구로 만든다는 구실로 레닌그라드로 이름을 재차 바꾸었다. 혁명 지도부의 관점에서 보면 레닌그라드는 파괴해야 할 과거에 집착하는 불온한 무리들의 소굴일 뿐이었다. (역사는 참 아이러니한 것 같습니다. 전제 군주인 표트르 1세가 만든 도시로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고 그 문화의 연장선에 의해 혁명이 발생해 제국은 소멸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가 만들어지면서 도시의 이름도 바뀌었죠. 그리고 사회주의가 실패한 후, 1991년 그 도시는 다시 예전 제국 시절의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단지 이름만 바뀌었을까요?)
“소년기와 청년기의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견해는 대개 일치한다. 연약하고 예민해 보였고 관찰력이 아주 민감했지만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 신체, 특히 손을 불안할 정도로 끊임없이 움직였다. 항상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끝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예민해서 온통 노출된 신경 다발처럼 보였다. … 기분 변화가 아주 급격하고 변덕스러웠지만 그런 변덕이 다른 사람을 겨냥한 적은 없었다. … 이러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정신적으로 아주 강인했다. 주위 사람들은 영향력에 쉽게 휩쓸리지 않았고 절제력이 아주 강했다. … 그의 불가사의할 정도의 겸손함에서도 사람들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자기가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에 대해서는 별로 감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사회적 위치와는 완전히 별개인 개인으로 간주하려고 했고 자신도 그런 개인으로 간주되기를 원했다. (이 글을 읽으며,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쉽게 이야기되는 ‘천재’ 담론이 생각이 났습니다. 조금 머리가 좋아 보이는데, 성격이 괴팍하고 비일비재하게 타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부류의 사람’을 어떤 이들은 ‘천재’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사람들은 절대 천재라고 이 사회가 불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쇼스타코비치 같은 사람이 정말 ‘천재’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 머리만 좋은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에 관심도 없으며, 책임감 또한 1도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타인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관심도 없어, 무례하고 또 무례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의(쇼스타코비치) 관심은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특히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대한 관심은 상당했고 고골, 체호프, 도스토옙스키 등의 작품을 숱하게 암송할 수 있었다. … 청년 시절부터 쇼스타코비치는 끊임없이 오페라 작곡을 시도했다.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공격받지 않았더라면 그의 오페라 작곡은 훨씬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우리들은 과거 많은 천재들의 ‘덕’에 의해 현실의 삶을 풍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쇼스타코비치가 평생 흠모한 도스토옙스프스키 그리고 카뮈, 체호프, 베토벤, 모차르트, 쇼팽 등등. 만약 모차르트가 5년만 더 살았다면, 슈베르트가 31살이 아닌 41살에만 죽었다면, 그리고 우리나라의 1세대 지형학자이신 박동원 교수가 45살이 아닌 정년까지 교수 생활을 했다면 우리나라의 지형학은 어떻게 됐을까요? 쇼스타코비치 또한 독재적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자유로운 국가에서 태어나 작품 활동을 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오페라를 3곡이 아닌 더 많이 작곡했겠죠. 윤이상 선생님 또한 박정희 독재 정권이 아닌 지금과 같은 자유로운 민주국가에서 활동하셨다면 더 많은 훌륭한 곡을 작곡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시대가 야속할 뿐입니다.)
“그가 무엇보다도 좋아한 것은, 생의 고통스럽고 아름답지 못한 측면을 꿰뚫어보면서도 그것에 대한 유머와 풍자 감각을 잃지 않는 태도였다.”
“쇼스타코비치는 냉전시대 전체에 걸쳐 소련 정부가 내세운 프로파간다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에, 또 그 스스로가 그런 정부의 요구에 어느 정도 부응했기 때문에, 서구 음악계에서의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평가는 소련 체제의 옹호자, 정권의 어용 작곡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자라는 것으로 굳어져 있었다. … 볼코프와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쇼스타코비치는 깊은 내면에 숨겨져 있던 체제 비판적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의 비판성은 솔제니친이나 사하로프 같은 공개적 반체제 인사와는 다르다. 소련 체제를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 위에서 창조적 삶을 유지해나가기 위해 그는 외면적인 복종과 내면적인 독립을 교묘하게 공존시켰다. 그는 항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살기 위해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적응해야 했다. (아마도 이런 쇼스타코비치의 딜레마적인 상황과 유사한 삶을 산 음악가로 2차 세계대전 나치에 의해 이용당한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푸르트벵글러가 있을 것입니다. 그 또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나치에 부역한 범죄자 또는 자신의 음악활동과 예술을 위해 ‘외면적인 복종과 내면적인 독립’을 지킨 음악가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여하튼 푸르트벵글러의 전시에 녹음된 베토벤 교향곡은 정말 좋습니다. 제 스타일입니다.)
“본문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이 악을 공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스탈린이 자행한 모든 가치 있는 것, 러시아적인 것의 파괴에 대한 비통한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그와 절친했던영화감독 코진체프는 ”쇼스타코비치 음악의 본질은 선을 파괴하는 세력에 대한 가열한 분노, 증오“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러한 분노가 러시아 휴머니즘의 본질이라고 여긴다. … 그는 이중적인 가면을 쓰고 살았다. 그의 진정한 감정을 담은 음악은 가장 힘들던 시기에는 연주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는‘서랍을 위해’ 작곡했고, 이런 작품들은 영화음악이나 ‘살기 위해’ 작곡된 공식적 작품과 분명히 구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