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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9 20:36
한동안 생업에 매진하다 보니, 일주일에 한두번 올린다던 일기 같지 않은, 독서일기는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자려고 누웠는데, 불현듯 기억이 나 카페에 들어와 보니 마지막으로 올린 날짜가 7월 22일. 헉. 읽은 이 없어도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어 했던 일이니 그래도 되든 안되는 꾸준히 해보려 했는데, 이렇게 내 자신과 약속 지키기가 어려움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이번 책은(제 독서 특성상 한 권을 꾸준히 읽지 않고, 그냥 잡히는 대로 기분따라 읽는 편이라, 시작은 하되 끝은 언제일지 모를 독서입니다) 지리전공자들 사이에서 그래도 조금은 돌풍을 일으켰을 것 같은 양승훈 교수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입니다. 여러 글들에서 이 책에 찬사(?)를 보냈지만, 저는 처음 기대와는 달리 뒤로 갈수록 힘이 빠져 한동안 읽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독특한 이력과 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선업과 거제에 대한 스토리텔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을 다루는 지리전공자들에게 뭔가 교훈을 줄것 같습니다. 세번에 걸쳐 올리겠습니다.
p.43~47
“선박 건조는 블록 쌓기와 비슷하다. 강판을 잘라 가공해 붙여서 작은 블록을 만든다. 블록을 붙이고 붙이고 또 붙여서 점차 규모를 크게 만든 후, 선박의 기능을 하는 엔진과 항행 장비 등 의장품을 블록 안에 설치해, 도크장에서 최종 탑재 과정을 거치면 배의 모양이 완성된다. … 1970년대 유럽이 쥐고 있던 조선산업의 패권을 아시아로 가져온 것은 일본이었다. … 1990년대 세계 조선 산업의 패권을 획득한 한국의 강점은 무엇이었을까. 임금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조선 산업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저임금 노동이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은 기술 면에서도 세계를 제패했다. … 한국 사람 모두가 ‘IMF 관리 체제’하에서 정리해고와 도산 등으로 실직을 당하고 전전긍긍하던1998년, 거제의 조선소 노동자들은 ”개가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니는“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원-달러 가치가 고공 행진을 할수록 수출 위주의 조선산업의 경쟁력은 더욱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옥포만의 기적’이라 불리는 조선산업의 성장과 거제 사람들의 부유함이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해주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주자의 도시로 거제를 바라 볼 필요가 있다.” (거제뿐만 아니라 울산, 창원도 인구, 이주의 관점으로 살펴본다면 뭔가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종 또는 진천과 같은 혁신도시들도 이주의 관점에서 도시 내부를 들여 본다면 보이지 않던 그 무언가가 보일 것 같습니다. 이런 걸 지리학자들이 해야하지 않을까요!)
p.56~58
“중공업 가족의 ‘가족’이 단순히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가족’이란 노동자 공동체와 직원 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지속된 노동조합의 전통은 노동자 공동체를 가족으로 만들어냈다. … 대우조선 옥포조선소가 준공되어 선박 건조를 시작한 1978년 이후 인구는 더욱 급증했다. 남성 위주의 노동 인구가 증가하자 여성들의 결혼 이주 역시 촉발되었다. 채용된 노동자들의 학력과 직무 형태, 출신 지역의 영향에 따라 결혼 이주자의 구성은 달라진다. 예컨대 대졸 사무직 부부와 고졸 생산직 부부의 출신지는 다를 확률이 크다. 노동자들이 산업도시 거제로 이주해 낳고 기른 자녀들은 또 어떨까. 대학 등록금 지원 등 회사 복지와 높은 소득 수준에 따라 형성된 높은 교육열로 키워낸 자녀들이 고등교육 혹은 중등교육을 마친 후 어느 도시에 자리를 잡는지, 또 그들이 거제라는 도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국토애, 향토애라는 단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몇 십년을 살아간 그들에게 자기가 살아온, 살고 있는 지역 동네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건 참 의미있고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 그런 지역은 아마 고향인 천안과 대학 생활을 한 공주 그리고 초임 발령지이며, 결혼 생활을 시작한 관악구 봉천동일 것 같습니다.)
p.59~68
“평일 아침 혹은 저녁 즈음, 거제도에서는 작업복의 물결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삼성(중공업), 대우(조선), 두 회사의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시내를 누비고 다닌다. 작업복에는 직원들의 소속과 이름이 쓰여 있다. … 삼성의 사무직들은 퇴근할 때 작업복을 잘 입지 않지만, 대우 사람들은 사장부터 용접공 신입사원까지 직군 직책 상관없이 작업복을 입고 다닌다. … 미혼인 직원들은 소개팅 자리에도 작업복을 입고 나간다. 작업복은 조선소 사람들이 차지하는 지위를 상징한다. … 계룡대, 파주, 진해, 혹은 진주 같은 군사도시에서도 군복은 전혀 다른 대접을 받는다. … 군복이 징집병이 아닌 직업군인의 상징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군복을 입은 군인이 군사도시가 아닌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돌아다니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들은 그저 ‘군인 아저씨’일 따름이다. 조선소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거제도에서 전문적인 직업인이자, 돈 잘 버는 직장인으로 대접을 받기 때문에 작업복을 더욱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각주: 언제가 가까운 부장과 함께 서울 출장을 간 적이 있다. 그는 작업복을 입은 채 당당하게 서울로 향했다. 그런데 서울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갈아입겠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에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다. … 기업문화 프로그램은 사내에서 ‘우리가 남이가’정서를 만드는 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이처럼 ‘대우 가족’, ‘현대 가족’, ‘삼성 가족’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 직원들은 일련의 동질성을 공유하면서 하나의 중공업 가족이 되어갔다. … 직원들끼리 쓰는 ‘식구’라는 말은 실제로 매일 세 끼를 함께 먹는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정직한 진실이라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회사 식당에서 아침과 점심을 함께 먹고 퇴근 후에도 술집에 가서 저녁을 함께 먹는다. 정작 함께 사는 가족들과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할 때가 많다.” (복장이 어떤 특별한 상징성을 띄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조금 다른 차원이기는 하지만, 사관학교 생도들의 생도복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가끔 학교 소개하러 육사나 공사 생도들이 학교에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생도복을 입은 사관생도를 보는 고등학생들의 반응을 보면, 뭔가 가기 어려운 대학생 오빠 누나를 보는 것 너머, 그 복장이 주는 그리고 그 복장을 입은 학생들의 자부심에서 풍겨오는 묘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아마 대우조선 작업복을 입은 그들도 생도복 못지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겠죠.)
p.73
“거제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세계가 다른 지역으로 나가는 사람과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점차 ‘낯설게’ 드러나고 있다. 지속적인 호황으로 덮여 있던 문화적인 ‘낯섦’이라는 모순은 경기가 하강하기 시작하자 그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역을 이해하기 위해 그 지역의 인구와 이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강남구 도곡동에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A라는 가족과 B라는 가족이 있다고 했을 때, 사는 지역과 아파트가 동일하다고 해서 이 두 가족의 사회경제적 환경이 같지는 않겠죠.(물론 유사할 확률이 더 크겠지만) 물론 이런 부분들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겠죠. 하지만, 어느 순간 외부적 ‘충격’ 또는 내부의 ‘사건’을 통해 ‘민낯’이 외부로 드러날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드러나기 전에 그것들을 생각해보고 추론해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라면 재미인 것 같습니다.)
p.85~90
“거제시의 남성 고용률은 2017년까지 80% 이상을 기록했다. 이는 전국 평균보다 10% 가까이 높은 수치이다.반면 여성 고용률은 45% 이상을 기록한 적이 거의 없다. 전국 평균(50.2%)보다 5% 이상 처진다. 남성은 나가서 돈을 벌고 여성은 전업주부로 지내거나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부업을 하는 전형적인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 경제라고 말할 수 있다. … 사무 보조부터 시작하는 여성들의 일자리는 언제나 예외 혹은 ‘덤’으로 여겨지기 일쑤였다. 회사 안에서 종종 ‘여직원’이라는 단어가 문제가 된다. 공채로 입사한 여성 사무직들과 이들 계약직이 공존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사무보조 업무로 입사해 똑같이 ‘사원’이라는 직위에 있더라도, 공채를 통해 남성들과 똑같은 포지션으로 입사한 여성 사무직 직원들은 같은 ‘여직원’으로 불리는 것을 꺼려한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이라는 ‘아저씨’, ‘기사님’, ‘행정실무사’, ‘행정보조’ 등 호칭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누군가와 다름을 그리고 그 누구보다 내가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아닌척해도.)
p.95~107
“성인 남성이 거제도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은 다름 아닌 ”대우 다니세요? 삼성 다니세요?“라는 질문이다. 대답을 하면 상대는 뜸을 들이다가 다시 묻는다. ”직영이세요?“ 다소 폭력적인 언사일 수 있지만, 거제도 사람들은 습관처럼 던지는 질문이다. 어쩌면 이런 사소한 습관들이 이미 울타리 안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많은 것들을 말해주는지도 모르겠다. … ‘정상가족’ 신화는 사실상 호황기에 하청 노동자 가족을 하위주체로 만들면서 그 가족을 은연중에 배제하고 발언권을 박탈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비슷비슷한 벌이로 소비 생활을 이어가던 중산층 노동계급 가족은 수적으로 그 두 배 이상으로 추정되는 하청 노동자들과 한편으로는 현장에서의 위세로, 다른 한편으로는 중소 도시 내부의 좁은 사회에서 은연중에 발생하는 차별을 통해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 하청 노동자들은 작업에 필요한 공구를 받기 위해 공구 창고에 갈 때, 창고에서 직영을 우선으로 챙겨준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한다. 이에 직영 담당자들은 하청 직원들이 공구를 헤프게 써서 그렇다고 응수한다. 또한 하청 노동자들은 작업 중에 안전관리자들이 자신들에게만 험한 말투로 지적을 한다고 전한다. 이에 안전관리자들은 하청 노동자들이 안전 규정을 잘 지키지 않아 애를 먹는다고 호소하고, 가장 바쁘고 어려운 공정을 배정받아 인해전술로 처리하는 하청 노동자들은 다시 규정이 너무 빡빡하다고 반박한다. … 하청 노동자들은 일이 몰릴 때마다 손쉽게 동원된다. 야근,휴일 근무, 명절 근무 역시 언제나 하청 노동자들의 몫이다. 원청 회사에서 제공하는 수십 대의 귀향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하청 노동자들은 자기들끼리 조를 정해 쉬는 날을 쪼개어 공정을 처리한다. 이런 날 조선소 근처의 식당가는 문을 닫기 일쑤여서, 이들은 원청에서 나눠준 빵이나 우유 등의 간식으로 끼니를 때우곤 한다. 공구 창고에서 꼭 필요한 공구를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차별과 설움은 일하는 와중에 하청 노동자들의 뼛 속 깊이 각인된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노동 운동은 이미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주인’이 아닌데 ‘주인의식’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대부분 이런 요구는 주인이 노예(아주 거칠게 비유한 것입니다.)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학교의 주인은 우리 집의 주인은, 우리 사회의 주인은 그리고 대한민국은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합니다. 과연 누가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을까요?)
p.109~114
“안정된 고용, 높은 임금이 보장된 생활은 흔히 좋은 직장의 대표 조건으로 꼽힌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살고 싶은 지역’에 대한 질문을 놓치게 된다. … 중공업 가족 중심의 사고방식은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이 살고 싶어 하는 환경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청년들은 학부모들과 원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 … 개인주의자로 자란 젊은 세대의 청년들은 그런 문화가 낯설기만 하다. 언젠가 ”거리에 나가면 다 우리 가족들인데 얼마나 좋냐?“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람들을 피해 숨을 데 하나 없이, 하루를 온전히 회사 사람들과 보내는 것도 모자라 퇴근 후 늦은 밤까지 함께 있어야 하는 문화. 퇴근하고 혼자 커피 한잔을 하며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이런저런 공부를 하는 ‘셀러던트’의 자리는 없고, 회사 상사에게서 벗어나 다른 직장을 다니는 친구들과 편하게 ‘뒷담화’를 할 수 있는 소박한 술자리도 갖기 어렵다. 서울에서 어렵지 않게 누릴 수 있는 익명성이 사라진 상황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 무엇보다도 중공업 가족은 그들과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젊은 세대들에게 그 약점을 남김없이 드러냈다.젊은 세대는 셔틀버스로 출퇴근을 하는 쪽을 택함으로써 중공업 가족이라는 틀을 거부하고, 경기에 따라 이직을 선호하는 등 확실히 다름을 표방했다. 딸들은 거제를 떠나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아빠들의 믿음을 저버렸다. 노동자들의 ‘단순한 삶’은 나름대로 예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나, 가족 안에 머무르기를 꺼리는 이들에게 그것은 한낱 보수적인 삶의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부동산 공화국’으로 불리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집’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요? ‘내가 살고 싶은 지역’은 어디인가? ‘내가 원하는 집은 어디인가’라는 깊은 고민 없이 ‘시세 차익’만을 노린 투자는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한 부재를 낳습니다. 집이 있되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