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블로그에 쓴 페이퍼를 옮겨 놓는다. 한국지리 수업을 하며 공업 발달과 근대화를 애기하면 어쩔수 없이 일제시대의 시대적 상황과 그 당시의 발전(?) 상황을 학생들에게 애기를 해야 할 경우가 많다. 이때 어떤 관점에서 어느 정도까지 학생들에게 애기를 해줘야 하나 난감할 경우가 많다. 대부분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적인 그리고 반민족적인 점에만 포인트를 두고 간단히 언급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것도 어찌보면 공정치 못하다는 생각이다.  허수열 교수의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은 이런 상황에서 아주 좋은 참고서가 될 듯 하다. 그러나, 아주 어려운 참고도서가 될 듯 하다. 이게 좀 어려우면 같은 저자의 2005년 <개발 없는 개발>를 읽는게 도움 될 듯 하다. 부제가 아주 명쾌하다.  '일제하 조선경제 개발의 현상과 본질' 방학때 시간내어 한 번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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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하도 게을러져서 블로그에 글 쓰는 것도 한동안 뜸했다. 12월에 본 서울시향의 말러 교향곡 8.9번 그리고 베토벤 교향곡 9번에 대한 후기도 메모만 해놓고 페이퍼 작성도 못했다. 솔직히 그렇게 바쁘지도 않고 더구나 요즘 방학기간이어서 시간도 얼마든지 충분하지만 늘어지는 요즘이다. 한동안 늘어졌으니 이제는 기운 좀 차려야겠다.

 

오늘자 신문에서 본 기사 하나 스크랩한다.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실증적 비판서이다. 그런데 책의 저자가 식민지근대화론의 선두주자라 불리는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가 주축이 되어 만든 낙성대경제연구소 출신이라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같은 저자의 2005년에 나온 <개발 없는 개발>을 먼저 읽는게 도움이 될 듯 하다. 경제사학의 관점에서 '식민지 개발, 근대화론'의 논리적 허구성을 파헤친 책이니 수업 시간 학생들에게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때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한겨레신문 2012.1.4  식민지근대화론 ‘실증적’으로 비판하다

 

`일제 초기 조선의 농업’ 출간
김제·만경평야 기존 연구 등
농업개발론 실증 비판 초점
개발론·수탈론 치우침없이
‘구조론’ 통해 사실 규명 집중

 

 » 2007년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조정래 작가가 쓴 소설 <아리랑>에 묘사된 전북 김제·만경평야가 1904년 당시엔 바닷물이 수시로 들어오는 갯벌이었으며, 일본인들에 의해 농업이 가능한 지역으로 개발됐다는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해 허수열 충남대 교수는 “당시 김제·만경평야는 갯벌이 아니고, 다양한 수로가 만들어져 있는 등 농업이 이뤄지고 있었다”며 “실증적 연구를 철저하게 펴지 못한 식민지근대화론의 오류”라고 주장한다. 한길사 제공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 ‘징게 맹갱 외에밋들’이라고 불리는 김제·만경평야로 곧 호남평야의 일부였다. (…) 그 초록색 들판은 누구에게나 한없이 넉넉하고 푸짐하면서도 경건하고 겸손한 마음까지 품게 했다.” (조정래, <아리랑>)

 

“<아리랑>이 시작되는 1904년으로 돌아가면 그 지평선까지는 광활한 갯벌과 소금기로 풀이 죽어 있는 갯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조정래는 징게 맹갱 외에밋들의 광활함과 풍요로움을 구성지게 노래했다.” (이영훈, ‘김제 역사의 본류에 진입 못 하고 이방인으로 맴돈 조정래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구별조차 못하는 엠비시(MBC)’, <시대정신> 2007년 가을호)


조정래 작가는 장편소설 <아리랑>을 통해 풍요로웠던 전북 김제·만경평야의 모습과 거기에서 벌어진 일본인들의 참혹한 수탈에 대해 말했고, 경제사학자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갖가지 실증자료를 들어 이를 비판하며 ‘일본인들이 개발하기 전 김제·만경평야는 갯벌이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2007년 벌어졌던 이 논쟁의 진정한 승자는 과연 누구였는가?

 

6년 전 <개발 없는 개발>이라는 저작을 통해 ‘실증’을 무기로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을 공격했던 허수열 충남대 교수가 다시 한번 식민지근대화론을 실증적으로 비판한 책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한길사 펴냄)을 펴냈다. 허 교수는 조정래의 ‘수탈론’, 이영훈의 ‘개발론’ 모두 사실로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한다. 산더미 같은 자료들을 뒤적여 그가 내린 결론은 매우 건조하다. “일제 초 김제·만경평야는 조정래가 생각한 것처럼 풍요로운 평야지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해안에서 6~7㎞ 떨어진 벽골제 앞까지 갯벌이었다고 본 이영훈의 주장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 흔히 수탈론과 개발론의 대립으로 압축되는 식민지근대화 논쟁은 여전히 우리 역사학계의 가장 큰 화두다. 최근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자유민주주의 논쟁’과 같은 역사 인식의 대립도, 그 근원을 따져올라가다 보면 일제강점기에 대한 해석의 대립에 닿는다.

 

특히 실증적 방법론을 내세운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기존 민족주의 사학을 공격하는 모양새가 계속되어 왔다. 그런데 식민지근대화론의 진앙지라 할 수 있는 낙성대연구실(현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창립 멤버였던 허 교수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논쟁을 제기한다. 곧 식민지근대화론이 보여주는 실증적 연구가 도리어 실증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각종 통계와 사료, 지도 등 엄청난 규모의 실증적 자료 분석을 담은 이 책은 식민지근대화론이 강조해온 농업개발론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제시대 농업연구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자료는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김낙년 엮음)이 정리한 일제시대 조선의 국내총생산(GDP) 추계다. 이 자료에서 나타난 1910~1945년 사이 농업생산의 성장에 따른 국내총생산의 비약적 증가는 ‘일제시대에 근대적 개발이 이뤄졌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의 기초적인 근거가 됐다.

 

그러나 허 교수는 “1910년대의 국내총생산 통계는 과소평가되어 있으며, 이런 오류를 바로잡는다면 일제강점기 때 비약적 성장이 있었다는 주장은 허구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농업생산량 통계의 작성법은 1908년에 처음 시작되었고 1915년 관련 훈령이 나오면서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됐기 때문에, 1917년까지의 통계는 아직 체계화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 조선총독부가 1918년과 1919년 <통계연보>에서 과거 통계들을 수정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김제·만경평야에 대한 연구는 이런 큰 문제의식을 뒷받침하는 실증적 방법 가운데 하나다. ‘벽골제가 저수지가 아닌 방조제였고 그 앞까지는 갯벌이었다’는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당시 보잘것없던 한국의 농업생산력을 실증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실증적 접근을 편 허 교수는 “벽골제는 저수지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종합적으로 볼 때 김제·만경평야에는 농업용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정상적인 농업이 이뤄졌다”고 결론짓는다. 이밖에도 재배면적과 농업기반시설의 변화, 우량품종의 보급 등 다양한 농업생산 요소들을 검토한 연구들을 통해 ‘일제강점기 때 농업생산이 급증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장은 사실로서 성립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했다고 해서 무작정 전통적인 수탈론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수탈은 생산수단이 일본인 수중으로 집중되고, 소득이 민족별로 불평등하게 되고, 그것이 민족차별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이 확대 재상산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허 교수는 개발론과 수탈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총체적인 구조를 보는 ‘구조론’을 통해 사실을 규명하는 데 집중했다. 책의 첫머리에서 “서로 다른 이론의 안경을 쓴 과학자에게는 같은 사실도 다르게 보인다”는 미국 경제학자 새뮤얼슨의 경구를 인용한 것도 그 때문이다.

 

기사 원문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5132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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