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횡단열차6

2009.07.30 12:00

관리 조회 수:7204

이름이우평(조회수:1775)
(2003-04-17 00:00:01)

* 80시간의 장도를 달려 드디어 러시아의 혼과 역사가 살아 숨쉬는 대국의 심장부 모스크바에 도착하다.(8/12-13)

12일 예정된 시각 오전 10시 47분을 어기지 않고 기차는 정확하게 모스크바역에 도착했다. 내가 태어나 가장 오랜 시간 기차를 탔던 기억으로 여겨질 것이며 혹 앞으로도 이 보다 더 오래 기차를 탈 기회가 올는지…. 80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달려와 러시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또 다른 유럽 제 3의 로마인 모스크바에 발을 내리게 된 것이다. 힘들고 지친 몸을 이끌며 현지 가이드를 만나 모스크바에서의 하루 동안의 일정을 세우고 곧 바로 도시의 답사에 들어갔다.


모스크바 도심 전경. 가운데 자리잡은 볼쇼이 국립극장. 러시아가 세계에 자랑하는 발레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볼쇼이 극장을 차량 내에서 촬영한 것이다.

눈에 들어온 모스크바 도시의 전경은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일상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잘 정돈된 도로체계 그리고 그 도로를 따라 제정 러시아 시대에 건축된 듯한 서구적 양식의 고층 건축물과 함께 사회주의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현대식 건물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차량들도 무척 많았으며 대부분 외제 차들이었는데 한국차도 자주 눈에 띠었다. 전반적인 도시의 풍토는 역시 블라디보스톡에서 하바로프스크 이르쿠츠크를 거쳐 모스크바에 이르는 전구간의 도시에서 살펴본 바와 다름없는 유럽의 모습이었다. 또 다른 유럽이 이곳 모스크바에 잘 조각되어 있었다. 성대하게 만들어진 사원들과 고층의 유럽식 건물들 그리고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자유분방하며 여유 있는 얼굴 표정을 바라보면서 정말 이들이 과거 사회주의적인 삶을 살아온 게 맞나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였다.

여기서 모스크바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모스크바는 1237년 몽고의 키예프 공국 정복 이후 러시아인들의 삶의 근거지가 북방으로 밀려나면서 러시아의 새로운 중심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이전에는 지금의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가 당시 국가형태를 띤 러시아 최초의 수도였다.) 이후 이반 3세의 각고에 걸친 노력으로 1480년 240년 간 타타르인의 멍에를 진 시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 부활의 시대를 예고하며 발전을 거듭하다가 표르트 대제의 서구화 및 북방 정책의 추진으로 수도를 페테르부르크로 옮기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전제정치의 몰락을 고하는 볼세비키 혁명과 함께 다시 레닌이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기면서 사회주의 체제인 구소련 당시 세계의 힘을 한곳에 모았던 핵심지로 오늘날을 맞고 있다.

 
크레믈린 내의 러시아 대통령궁 전경. 깃발이 꽃여진 곳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집무실이다.


모스크바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붉은 광장 전경. 과거 구소련 체제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힘이 솟아나오는 원천지라고 할 수 있는 붉은 광장에서 아내와 함께 하였다. 뒤로 성 바실리 성당과 시계 첨탑이 바라다 보인다.

오전에는 먼저 크레믈린 붉은 광장 성 바실리 성당을 그리고 오후에는 레닌 언덕 모스크바 대학 모스크바의 예술 거리라고 하는 아르바뜨 거리를 둘러보았다. 크레믈린은 러시아어로 성벽이라는 뜻을 지닌다고 한다. -세계사에 있어서 대부분의 국가와 민족에게서 찾아볼 수 있듯이 러시아 또한 고대로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숱한 외세의 침입을 경험한 바 있다. 물론 근․현대사에 있어서 러시아 또한 제국주의 대열에 끼어 제국과 식민지 확장에 주력한 바 있기는 하지만 중세 몽고의 침입 북방 민족의 침입 근대 나폴레옹의 침략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나치 히틀러의 침입 등은 러시아가 끝없는 외세의 침략으로 고통받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모스크바의 지도를 구입하여 살펴본 결과 과히 모스크바는 포트리스(fortress) 요새와 같았다. 모스크바 강이 S자로 휘돌아 가는 요목에 크레믈린 모스크바의 수도가 위치하고 있었으며 강을 건너야만 공격이 가능했다. 또 강을 건넌다해도 높은 성벽을 넘어야 모스크바 점령이 가능했다고 하니 정말 난공불락의 요새화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아마도 끝없이 계속된 외세의 침입의 역사에서 크레믈린이 러시아의 심장부인 모스크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성벽의 규모는 중국 북경의 자금성보다는 훨씬 작았으나 모스크바 강을 끼고 우람한 모양새를 드러내고 있었다. 크레믈린 내에는 우리말고도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크레믈린은 모스크바의 가장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러시아 대통령 푸틴의 집무실과 각료들의 집무실이 위치한 정치와 권력의 중심이자 러시아 문화와 역사의 정수가 집결된 곳이기도 하였다. 성벽은 원래 12세기 목조로 건축되었으나 15세기에 현재와 같은 교회와 성벽이 세워졌다가 1812년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점령과 함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후 다시 재건하여 현재와 같이 20개의 탑을 가진 성벽으로 재건되었다고 한다. 성곽 내에는 우스벤스키 사원 아르항겔리스키 사원 그라노비타야 궁전 병기고 및 무기고 등 다양한 건물들이 있었다. 러시아 대통령의 집무실 옥상에는 러시아 국기가 바람에 유유히 흔들리고 있었다. 현재 병기고 내부를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내부에 진열된 전시품들의 화려함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였다. 러시아 차르 전제 정권의 극치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붉은 광장 한 가운데 자리잡은 레닌 묘소. 러시아를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실험장으로 인도하였던 레닌을 추모하기 위해 시체를 방부 처리하여 안치하였다고 하는데 마침 월요일은 휴관이라 하여 입장하지 못했다.

크레믈린의 후문을 뒤로하여 몇 걸음 올라가니까 사회주의 체제 당시 러시아를 이끌었던 구소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붉은 광장이 나타났다. 규모는 생각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실망도 하였으나 러시아 역사에 숱한 질곡과 사회 변동의 무대가 되었던 격동의 현장 한 가운데 섰다는 생각에 흥분되기도 하였다. 광장 한 가운데는 러시아의 역사를 지구상 최초의 사회주의 체제의 실험장으로 이끌었던 레닌의 묘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남서쪽 광장 끝으로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 건축물이라고 하는 성바실리 성당이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광장의 색은 이름에서와 같이 붉은 색은 아니었고 회색의 벽돌로 덮여 있었다. 붉은 광장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 일대의 퇴적층이 적색을 띤 토양이었기 때문에 명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광장을 무대로 볼세비키 혁명군(적군)과 왕정 친위군(백군)과 치열한 투쟁의 역사가 전개되었다고 하니 과히 붉은 광장이라고 하기에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붉은 광장 주변에는 1890-1893년 간 지어진 건물로 사회주의 당시 국영백화점으로 이용되었다가 현재는 고급 상점들이 입주해 있는 굼 백화점이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서 점심을 패스트 푸드로 해결하고 우리는 곧 바로 모스크바 시내를 전망할 수 있는 레닌 언덕으로 이동하였다.


레닌 언덕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전경. 모스크바는 모스크바 강이 도시 한 가운데를 S자로 휘감아 돌아가는 평지 위에 조성되었다.

레닌 언덕으로 이동하는 중에 도시 곳곳에 우리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들을 홍보하는 대형 광고판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나라의 위상을 새롭게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레닌 언덕에 도착하여 모스크바 시내의 전경을 조망했을 때는 그날 따라 백색스모그가 심한 탓에 시야가 그렇게 맑지를 못했다. 모스크바 도시의 지형은 넓게 펼쳐진 평지로 구릉성의 낮은 산지조차도 찾아 볼 수 없는 그야말로 평탄 지형 그대로였다.


모스크바의 심장부 붉은 광장 전경


모스크바 중심부 크레믈린 앞에서 바라본 삼성 광고

 
크레믈린 건너편 그러니까 모스크바강 건너 엘지 광고

시내를 조망한 후 언덕에 위치한 모스크바 대학으로 발길을 옮겼다. 모스크바 대학은 러시아 역대 학자 중 가장 뛰어난 학자인 로마노소프가 세운 대학으로 러시아에서 최고의 엘리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이라고 하니 러시아의 브레인 뱅크인 셈이다. -러시아 대학의 대부분은 국가의 권력층과 요직에 있는 사람들의 자제라면 연줄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모스크바 대학만큼은 철저히 국가가 공개적으로 엄격히 관리한다고 한다. 러시아 최고의 실력으로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대학이기 때문에 졸업하면 러시아 사회의 엘리트로서 장래가 보장된다고 한다.- 이 건물의 일부에 쓰인 대리석 등의 돌은 2차 대전 중 당시 독일군이 진지구축을 위해 유럽 각지로부터 들여 온 것들을 독일의 패전과 함께 퇴각하는 그들로부터 빼앗은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에 7개의 스탈린 양식 -스탈린 양식의 건축물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첨탑 모양의 뾰족한 형태와 고딕 스타일을 띠고 있다. 모스크바에 모두 7개가 있는데 스탈린이 살아 생전 직접 진두 지휘하며 쌓았다고 한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외무성 모스크바 대학 두 곳과 우크라아나 호텔 문화인 아파트 예술인 아파트 교통부 레닌그라드스카야 호텔 등이 스탈린 양식의 건축물에 해당된다.- 의 건물이 있는데 모스크바 대학 또한 이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방학 때이어서 그런지 캠퍼스는 한산해 보였다.


모스크바 대학 전경. 러시아의 수재들이 국가의 전폭적 지지를 얻고 공부한다고 한다.


모스크바 예술인의 거리인 아르바뜨 거리 전경. 우리나라 서울의 인사동에 해당된다고나 할까?


 아르바뜨 거리 내에 경품으로 비치된 한국산 대우자동차의 씨에로.

모스크바 대학을 빠져 나와 우리는 예술인 거리라고 하는 아르바뜨 거리에 들렀다. 거리는 따가운 햇살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지도 한 장을 힘겹게 구하여 모스크바 도시에 대한 도상 투어(mapping tour)를 하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거리에는 다양한 상품들이 즐비했으며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 또한 다른 곳에선 찾아보기 힘든 만큼 세련된 미적 감각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어느덧 시계 바늘은 저녁 6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침부터 무척 힘든 하루였는데 일행들은 짧은 시간 내에 모스크바를 이곳저곳 둘러보아야 한다는 욕심에 며칠 간 계속되었던 80시간의 기차 여정을 까마득히 잊은 듯한 모양들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여정을 풀면서 그렇게 힘든 모스크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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